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시안 게임 (문단 편집) == 대회와 관련된 몇 가지 에피소드 == * 1974년 테헤란에 대회를 유치한 [[이란]]은 육상 종목의 꽃인 [[마라톤]] 종목의 개최를 거부하였다. 이유는 [[페르시아]]가 고대 아테네에게 패했던 [[마라톤 전투]]에서 유래한 것이 마라톤 종목이기 때문이라고 알려 졌지만 실제로는 선수가 없었다는 이유가 있었다. * 아랍 국가들은 오일 달러를 바탕으로 [[아시아올림픽평의회]]에 압력을 넣어 [[이스라엘]]의 참가를 좌절 시켰다. 과거에 아시안 게임을 주관하는 기구는 아시안게임연맹(AGF)이란 비상설 기구였다. 그런데 [[1982년]]에 이를 해체하고 [[아시아올림픽평의회]]란 상설 기구를 만든 것이다. 이러한 개편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이스라엘 같은 정치적인 문제를 불러오는 팀의 참가를 아예 봉쇄해버리기 위한 목적도 있다. 이러한 압력은 AFC(아시아축구연맹)에서도 일어나서 이스라엘은 1978년 이후 아시안 게임의 참가가 영영 중단되었을 뿐만 아니라 대륙 축구 연맹 또한 유럽으로 옮겨야 했다. 아시아의 강호였던 이스라엘은 유럽으로 이적한 후 월드컵 본선에 나가지 못하고 있다. 다만 최근에는 아랍에미리트와 바레인 등 중동 아랍 국가들이 이스라엘을 승인하고 이스라엘과 아랍권 국가들이 국교 수립과 관계 개선에 나서고 있는 실정인지라 이스라엘의 아시안 게임 참전과 AFC로의 복귀 가능성도 점쳐지고 있는 상황이다. * 이스라엘과 비슷하게, [[대만]]도 [[중국]]의 [[하나의 중국|압력]]으로 인해 한동안 [[버로우]]를 타다가 지금은 [[중화 타이베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오고 있다. * 한국에게는 아시안 게임에 관한 [[흑역사]]가 있는데, 1970년 제6회 대회를 서울에 유치하고도 준비 부족과 국제적 망신을 우려한 정부가 대회 유치를 포기했다. 결국, 6회 대회는 바로 4년전 대회를 치렀던 태국의 방콕에서 다시 치러졌다. 안 그래도 아시안 게임으로 인해 재정적자에 시달리던 태국은 대회를 징검다리 형식으로 연속 개최하면서 적자가 더욱 심해졌다. 이때, 반한 감정이 일어나서 제6회 대회에서의 한국 선수단 입장이나 한국의 경기가 있는 곳에서는 항상 야유가 따라 다녔다. 태국은 8년 뒤에 열린 8회 아시안 게임 때도 대회를 개최하려고 했던 파키스탄의 [[이슬라마바드]]가 포기해서 또 개최를 떠맡게 되었다. * [[카자흐스탄]]은 전 종목 중에서 딱 하나 [[축구]]만은 유럽축구협회 [[UEFA]] 가입국이라 참가를 못한다. 국토의 서부 일부가 유럽이라는 이유로 유럽리그에 참가한다.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는 통상적으로 [[우랄 산맥]]과 [[캅카스]]로 나누는데 그것때문에 [[조지아]]와 [[아제르바이잔]]도 캅카스 이북 일부가 유럽으로 분류된다. --뱀의 몸통이 아닌 용의 꼬리가 된 셈-- 하지만 다른 종목은 메달 잘만 딴다. * 카자흐스탄과는 반대로, [[호주]]도 축구 협회가 [[AFC]] 소속이지만 [[아시아올림픽평의회]]의 회원국이 아니어서 참가 자격 자체가 없기 때문에 축구만 따로 참가할 수도 없다. 다만, 심판 파견은 가능하며 아시안게임 자체가 꼭 아시아 심판들만 참가하는 것은 아니다. 선수는 아시아 선수만 되지만 다른 대륙 출신 심판은 다른 종목에도 꽤 있었다. 실제로,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 축구에 호주 출신인 벤 윌리암스(Ben Williams)가 주심으로 파견되었다. 한편 영국은 최근 올림픽 축구 출전을 포기하고 있지만(2012 올림픽 제외), 영국인 심판이 올림픽 축구에서 뛴 사례는 많다. * [[세계태권도연맹]](WT)의 산하 단체인 아시아태권도연맹의 회원국이 아닌 북한은 [[태권도]]에 참가할 수 없다. 북한은 [[최홍희]]가 세운 [[국제태권도연맹]](ITF)에 가입되어 있다. 육군소장 출신인 최홍희 총재는 1973년 [[캐나다]]로 망명한 후 북한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한편 대한민국 태권도계는 따로 [[세계태권도연맹]](WT)을 만들었고, [[김운용]]이 초대 총재가 되었다. 현재는 대한민국이 주도하는 세계태권도연맹이 주류이며, 국제태권도연맹은 최홍희가 사망한 뒤 여러 단체로 분열되면서 많이 쪼그라들었다. 여러차례 IOC에서 두 단체의 통합을 주선했으나 실패했다. * 2011 동계 아시안게임에서 [[카타르]]와 [[바레인]]이 처음으로 출전했다. 카타르는 스피드스케이팅 500m, 1500m에, 바레인은 아이스하키에 출전했다. [[몰디브]]도 참가 신청을 했으나 여러 사정으로 기권. * 원래 인천 아시안 게임의 차기 대회인 제18회 대회부터 올림픽 대륙별 예선을 겸해서 치르는 것으로 규정을 바꿔 2019년에 [[베트남]] [[하노이]]에서 아시안 게임을 열기로 했으나, 베트남의 경제문제로 2018년에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열리는 것으로 변경됐다.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 게임|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 게임]] 참조. 이런 아시안게임과 종목별 세계선수권대회를 두고 일어나는 문제는 앞으로도 개선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차후 개최 연도 변경 가능성은 2026년 개최 예정인 아이치·나고야 아시안 게임으로 예상되는데 나고야의 유치 목적 중 하나로 현재 공사 중인 [[츄오 신칸센]]의 홍보가 있는데 츄오 신칸센의 도쿄 [[시나가와역]] - 나고야 [[나고야역]] 구간 개통시점이 2027년으로 예정되어 있어서 그렇다. 그런데 그 전에 [[2022 항저우 아시안 게임]]을 현지 코로나의 심각성으로 인하여 대회명의 연도만 [[2020 도쿄 올림픽]]의 예처럼 변경하지 않은 채 1년 연기해서 2023년에 개최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아이치·나고야 아시안 게임 뿐 아니라 그 후에 개최될 아시안 게임도 그때의 계획대로 하계 올림픽 전년도에 개최할 가능성이 조금이나마 높아졌다고 볼 수 있다. * 아시안 게임에서는 한 나라가 금/은/동메달을 모두 가져갈 수 없다는 규정이 있다. 올림픽에서는 한 나라가 한 종목에서 1, 2, 3위를 모두 차지하는 경우가 그렇게까지 많지는 않아서 그때도 모든 선수에게 메달을 주지만[* 단 각 종목 규정으로 이런 상황을 원천봉쇄해서 메달 독식을 할 수 없게 만드는 경우가 있다. 체조를 예로 들면 최종 8명이 겨루는 결선에서 한 나라에 두 명까지만 들어갈 수 있게 하고, 3명 이상이 예선 8위 안에 들면 상위 2명만 결선에 갈 수 있고 다른 나라의 9위 이하를 진출시킨다.] 아시안 게임에서는 한/중/일이 워낙에 메달을 독식하다 보니 한 나라가 1/2/3위를 다 가져가는 일이 흔하다. 이런 경우 3위를 기록한 선수는 메달을 받지 못하고 다른 나라 선수들 중에 가장 높은 성적을 기록한 선수가 동메달을 가져간다. 물론 3, 4위의 기록은 바뀌지 않는다. * [[2002 부산 아시안게임]] 사격 러닝타깃 여자 10m 단체전이 여러 의미로 유명하다. 말이 필요없다. 당시 스코어보드를 직접 보자.[[https://en.wikipedia.org/wiki/Shooting_at_the_2002_Asian_Games_%E2%80%93_Women%27s_10_metre_running_target_team|#]] 3개팀 참가에 중국 1,141점 금메달, 한국 1,107점 은메달, 이란 358점 동메달. 이란 팀의 총점수가 한국이나 중국팀 어느 한 개인의 점수보다 못한다. 어떻게 된 것이냐면, 아예 이란팀이 대회 준비를 안 했다가 갑작스레 참가했기 때문이고 근본적 원인은 한국과 중국 대표팀의 선수단 메달 및 연금점수 관리. 열심히 대표팀을 꾸려 출전한 한중 양국이었는데 '''다른 참가팀이 없었다.''' 일본이 여기에 왜 참가 안했는지는 의문. 60여 아시아 국가가 참가하는 대회인데 아무리 세부종목이라지만 한중 2개팀만 참가하고 끝난 것. 이래서야 메달 경쟁은커녕 경기 자체가 성립 안된다. [[올림픽]], 아시안 게임 등의 대회는 최소 3개국 이상의 NOC가 참가하지 않으면 경기를 '''[[노게임|없던 것으로 처리]]'''한다. 즉 아예 종목 대회가 무산된다. 메달 획득 기회 자체가 사라질 위기에 처하자 두 나라 코칭스태프를 머리를 맞댄 후, 예비총기를 털어서 사격의 다른 세부종목에 참가하고 쉬고 있던 이란 선수들을 꼬드긴다. 이란 선수 중 Lida는 6년 전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동일 종목에 출전한 적이 있다. 당시 성적은 47명 중 43위. '''총만 쏘면 동메달이니 참가하라'''고. 이란 선수들도 공짜로 동메달 준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고 그렇게 그들은 몇 번의 연습사격만 한 채 경기를 치러 동메달을 수확했으며 중국과 한국도 노메달의 위기를 벗어나 사이좋게 금, 은메달을 나눠가졌다. 전 세계에서 쟁쟁한 선수들이 엄격한 과정과 치열한 경합을 거쳐 출전하는 올림픽과 달리, 아시안 게임에서는 아무래도 아시아 국가들이 취약하거나 경시하는 종목이 있기 마련이라 그 결과가 이런 식으로 나온 것이다. * 축구종목에 있어 1998년대회까지는 성인 국가대표팀이 참가하는 아시아 최강을 겨루는 대회였으나 이후 아시안컵의 권위를 살리기위한 차별화의 일환으로 23세이하 대회로 변경되었다. 여담으로 98년까지는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과 이란 축구 국가대표팀은 공동 최다 우승국으로 각각 3회씩 우승했다. * 대회 주경기장에 점화되는 [[성화]]는 제1회 대회가 열렸던 [[인도]] [[뉴델리]] 디안 찬드 국립 경기장과 대회별 개최국의 특정 지역에서 따로 채화한 뒤 개최국에서 합화해서 주경기장까지 봉송하고 있다. 아시안 게임의 상위급 대회로 볼 수 있는 [[올림픽]]의 성화가 고대 올림픽 개최지였던 [[올림피아|올림피아 신전]]에서 채화하는 것에서 착안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뉴델리에서의 성화 채화가 정착한 것은 역사가 매우 짧다. [[2014 인천 아시안 게임|2014년 인천 대회]] 때부터 생긴 관례이며 이전까지는 개최국에서만 성화를 채화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